강남 3부 : 오버스펙 다리와 영끌고속도로가 만든 강남 개발의 비화 (feat.한남대교, 경부고속도로)

발행일 : 2025-06-16 14:13  

"리치래빗"이라는 닉네임으로, 부동산에 대해 궁금해할만한 주제로 글을 쓰는 현직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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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은 처음부터 특별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1부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곳은 서울의 인구 과밀을 해소하기 위해 기획된 신도시였고,

그 기획은 단순한 주택 공급을 넘어 교육 기능을 심는 방식으로 완성되어 갔습니다.

명문고의 이전과 ‘8학군’이라는 브랜드가 만들어지며,

강남은 곧 자녀의 미래를 담보하는 투자처로 자리 잡게 되었죠.

 

2부에서는 강남이 단지 교육만이 아니라

권력과 공공기능의 이전을 통해 완성된 도시였음을 살펴봤습니다.

법조타운의 서초 이전, 한국전력 본사의 삼성동 이전,

그리고 종교 재산인 봉은사 토지를 둘러싼 갈등까지.

여기에 국가 권력이 조직적으로 개입해 도시의 기능과 구조를 재배치했다는 사실은

강남이 결코 ‘자연스럽게 성공한 도시’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강남은 선택받은 공간이 아니라, 선택된 공간이었던 셈입니다.

 

이번 3부에서는 어떻게 강남은 그렇게 빠르게,

그렇게 넓게 성공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주택과 학교, 공공기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물리적 확산력,

즉, 강남이라는 공간이 서울의 중심이자 전국과 연결되는 도시로 확장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지.

강남을 우리나라에서 제일 가는 입지로 만든 두 개의 인프라,

한남대교와 경부고속도로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한남대교는 강남 개발의 시작

▲ 혜은이, 『제3한강교』 (1979)

위 사진은 가수 혜은이 님이 1979년에 발표한 『제3한강교』라는 곡입니다.

대중가요에 제3한강교가 등장하는 이유는 이 다리가 당시 강남 개발과 경제 성장,

그리고 젊은이들의 꿈과 자유를 상징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곡의 가사 중

“강물은 흘러 갑니다. 제3한강교 밑을~ 당신과 나의 꿈을 싣고서 마음을 싣고서~”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다리가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젊은이들의 꿈과 감정이 흐르는 장소임을

강조한 것이죠.

또한, 제3한강교 개통으로 인해 신사동 등 강남 일대가

유흥가와 젊은이들의 문화 공간으로 변모하는 현실을 반영한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는 강북의 인구분산을 위해 만들어진 교량입니다.

60년대 이후 서울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기존 강북 지역만으로는

도시의 인구와 교통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워졌고,

한강 이남(강남) 지역으로의 인구 분산과 신시가지 개발이 필요해진 상황에서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한강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교량이 필요했습니다.

 

한강 이북 40%, 한강 이남 60%의 인구비율을 목표로 삼았는데,

그 당시에는 한강 교량이 “한강철교, 한강대교, 광진교, 양화대교”

이 4개 다리만으로는 이미 과도한 교통량을 감당하기 어려웠죠.

강남으로의 인구 분산과 신시가지 개발을 위해서는

강북과 강남을 최단거리로 연결하는 새로운 교량이 필요했습니다.

▲[좌] 제3한강교(한남대교)를 상공에서 바라본 모습(1969.11.17.), [우] 완공된 제3한강교(한남대교) 전경

 

 

 

하지만 군사적 필요성에 의해 설계?

60년대의 또 다른 한면을 살펴보면, 그 당시는 남북 군사적 긴장이 높았던 시기였습니다.

위에서 설명한 내용으로는 인구 분산을 위한 목적으로 건설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썼지만,

한편으로는 군사적 필요성과 전쟁대비 목적도 있었습니다.

▲『이대론 서울시민 다 죽겠다…한남대교 탄생비화, 땅집고(2020.10.19.)』1966년 1월 당시,
윤치영 서울시장이 발표한 ‘강남 개발구상’ 청사진

왜냐면 6·25전쟁(한국전쟁) 당시 한강철교(제1한강교)와 광진교 등 기존 다리가 조기에 폭파되어

서울 시민과 국군이 한강 이남으로 피난할 길이 막히는 아픔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이 경험은 전후 서울시와 정부에 큰 교훈이 되었고,

“다시 전쟁이 나면 시민들이 신속히 피난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게 된 계기가 된거죠.

하지만 당시 어려웠던 경제상황 때문에 아무도 요구하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윤치영 서울시장은

한남대교 건설의 목적을 강남 개발보다는 군사적 필요성,

즉, 전쟁 시 서울 시민의 대피로에 더 중점을 뒀습니다.

강남개발을 위한 구체적 개발계획이 아직은 부족했기 때문에

교량 건설의 명분으로 ‘인구분산’을 내놓은거죠. (한남대교가 대피로였다니...)

 

뭐…어쨌든, 1966년 초, 윤치영 시장은 퇴임하고 제3한강교 건설은 김현옥 시장에게 이관됩니다.

 

 

 

하지만 서울 시장의 초기 소극적인 진행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남대교 건설을 지시했지만,

당시 김현욱 서울시장은 한강 유역 개발을 강변 언저리까지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양재천, 잠실, 목동 같은 지역은 개발 구상에조차 없었죠.

그러던 차에 대통령이 한남대교 건설을 지시하자, 김 시장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입니다.

 

“왜 이걸 하라는지 모르겠다”

 

예산 책정부터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전문가들이 “최소한 1억 원은 잡아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김 시장은 단 1천만 원만 편성합니다.

사실상 흉내만 내고 넘기려는 태도였던 거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상황에서, 행정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돌변합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본격화되었고, 미친 듯이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당시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맡고 있는 건설사는 “현대건설”이었습니다.

정주영 회장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가세하여 경부고속도로는 엄청난 속도로 지어지고 있었죠.

경부선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연결되어야 하는데,

정작 한강을 건너는 길목인 한남대교는 공사가 지지부진한 상황이었습니다.

▲ 1986년,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 예정지역을 시찰하는 장면(국가기록원)

박정희 대통령은 어느 날 김현욱 시장을 청와대로 불러 이렇게 물어봅니다.

 

“임자, 한남동 어디까지 갔나?”

 

청와대에서 부산까지 직접 고속도로를 타고 가려면,

이 다리는 반드시 연결되어야 했기 때문에 다그치는거죠.

김현옥 시장 입장에서는 진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입니다.

 

 

 

오버스펙 다리의 탄생 : 자존심이 만든 6차선

한남대교 건설 초창기 때의 에피소드입니다.

처음 한남대교를 현대건설이 맡았을 때, 계획된 규모는 폭 20m에 4차선 도로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작아 보이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그조차 거의 과도한 수준이었죠.

차량 보급률도 낮았고, 강남 쪽은 사실상 논밭이었으니까요.

"야, 이 정도면 뭐 서울 도로가 빵빵 뚫리겠는데?" 하며 착공을 준비하던 어느 날,

뜻밖의 지시가 떨어집니다.

 

그 명령의 주인공은 ‘서정우’라는 인물. 육군 대령 출신으로

건설부 국토보전국장을 지냈던 인물이었죠.

예편 후 관직에 있던 그가 갑자기 서울시 공무원들을 불러모아 말합니다.

 

"한남대교 폭, 20m 말고 최소 26m로 넓히고 6차선으로 바꿔."

 

당연히 서울시 측은 당혹스러웠습니다.

왜냐면 그 당시 서울의 차량 보유대수가 2만 7~8천대 수준인데,

그 당시에는 4차선이면 충분한 규모였고

당시 전국의 자동차를 탈탈 털어도 6차선은 과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러자 서정호 대령은

 

“내가 확인해 봤는데, 지금 북한 평양 대동강에 놓는 다리가 폭 25m다.

우리가 그거보다 좁을 순 없지 않나. 자존심 문제야.”

 

이 내용은 현대건설 35년사와 현장소장의 회고에 따른 내용으로,

국토보전국장 ‘서정우’가 “최소한 그것보다 1m는 더 넓은 교량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해

서울시가 한남대교의 폭을 26m로 늘리게 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한남대교 돌연 폭 26m 6차로로 설계변경된 까닭은?』 대한경제 (2023.12.08.)

이게 6차선 설계변경의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상징의 싸움, 실용이 아니라 체면의 전쟁이었죠.

더 황당한 건 그 결정에 대한 학계와 관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그 당시 회의록을 보면 이런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 도로 폭이 너무 넓으면 차량들이 그리로 몰려 러시아워가 생길 수 있다.
실제로는 교통량 분산 효과가 더 크지만, 당시에는 도로 확장이 교통 혼잡을 유발한다는 생각이 일부 전문가 사이에 존재했습니다.

2) 다리가 넓으면 전시에 폭격당하기 쉬우니 오히려 좁아야 한다.
이는 군사적 논리로, 실제로 6·25전쟁 때 한강철교가 폭파되어 큰 피해를 입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3) 강남은 농촌인데 왜 큰 다리가 필요하냐?
당시 강남은 논밭과 배밭이 대부분이었고, 도시 개발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없었던 떄였죠.

4) 예산이 너무 많이 든다. 작은 다리로 충분하다
실제로 한남대교는 예산 문제로 인해 서울시와 중앙정부, 시의회 간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남대교는 설계도 수정 없이, 강행 설계로 6차선으로 확장되었고,

그 시점에서 서울 어디에도 없던 ‘오버스펙’의 상징적 인프라로 태어납니다.

단순한 다리가 아니라, 체면·정치·자존심·군사·속도전이 뒤섞인 복합 결과물이었죠.

 

현재의 한남대교는 가장 교통량이 많은 다리입니다.

이걸 그때 6차선이 아니라 4차선으로 만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 돌이켜보면, 이 결정은 선견지명이었습니다.

한남대교가 6차선으로 건설되지 않았다면,

이후 경부고속도로가 한남대교로 연결되면서 급증하는 교통량을 감당하지 못해

추가 교량 건설이 불가피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1990년대 후반 이후 한남대교는 교통량 증가로 인해

확장공사(왕복 12차선 등)가 진행되었으니…

6차선이라는 기존 규모가 없었다면 서울 강남북을 잇는 핵심 교통축이

더 빨리 병목 상태에 빠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의 한수였군요.

 

 

 

한국의 아우토반, 경부고속도로

박정희 대통령이 고속도로에 대한 꿈을 가지게 된 계기는 1964년 서독방문이습니다.

그 당시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에르하르트 수상과 회담을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서 에르하르트는 박정희에게 이런 조언을 남깁니다.

▲1964년 12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 (2014.03.19.) 문화체육관광부 제공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그 도로를 달릴 자동차 산업을 키우십시오.

자동차 산업을 키우려면 제철소와 정유공장이 있어야 하고, 이 모든 것을 뒷받침할 항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해 12월, 박정희 대통령을 독일의 아우토반을 직접 달리고 난 후,

한국도 고속도로가 필요하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좌] 윤보선 후보의 선거유세 장면(1967.04.17.), [우] 박정희 후보의 선거유세장면(1967.04.18.)

이후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마지막 선거 유세장, 장충체육관.

그 곳에서 그는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고속도로 건설과 사회간접자본 확충 계획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재선에 성공한 뒤 곧바로 경부고속도 건설을 추진합니다.

 

사실 그 당시는 우리나라가 고속도로를 지을 만한 상왕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1967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 약 130~150달러 수준으로 매우 낮았고,

정부 예산도 부족했습니다. 건설비 약 43억은 정부 예산의 ¼ 수준이었죠.

거기다 자동차 보급률을 생각했을 때, 일반인의 승용차 보급률이 매우 낮았습니다.

전국적으로도 그랬기 때문에 고속도로 수요가 많다고 보기 어려운 때였죠.

대부분은 버스와 택시였습니다. 그 외에 외화, 자본, 기술력 모두 부족했지만 추진됩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용은?

경부고속도로는 기술도 예산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된 대건설이었습니다.

그만큼 공사비 산정도 주먹구구식이었죠.

일단 처음에는 자본이 부족하니 군 공병부대를 중심으로 공사를 진행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금방 문제가 터집니다.

이게 공병부대의 단순 인력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규모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 이후에는 민간 기업과 각 부처에게 예산안을 제출하라고 합니다.

▲1990년 KBS드라마 『야망의 세월』의 한 장면, 각 부처별 경부고속도로 예산안을 보고하는 모습,
매일경제 (2023.09.13.)

1) 건설부 650억
도로 건설의 주무부처로서 최신설계기준, 안전성, 내구성, 미래 교통량 증가, 변수까지 고려해 넉넉하게 예산을 잡습니다.

2) 재무부 330억
재무부는 최소 비용, 최대 효과를 생각하며 가장 적은 330억 제출

3) 육군 공병부대 490억
군용 차량과 장비 통과를 고려해 도로의 강도, 내구성을 높게 잡았습니다.

4) 서울시는 180억
서울시는 고속도로 중 서울 구간만 책임지는 입장이라 전체 고속도로가 아닌 서울구간만 고려해 책정했습니다.

5) 현대건설 280억
현대건설을 태국의 ‘파타니-니라티왓 고속도로’를 수주해 시공중이었습니다. 실질적인 현장 데이터가 있었죠.

 

최고가와 최저가 차이가 470억이나 되었습니다.

최고액을 써 낸 건설부 장관은 “그 돈으로 책임지고 건설하게 하라”고 분노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건설부의 450억과 현대건설의 200억, 이 중간치인 300억까지 시작해봐.”

 

이렇게 주먹구구 식으로 시작하게 되었고, 여기에 예비비 10%를 더해 330억으로 결정됩니다.

 

 

 

반대의견들 : 아직 시기상조다

틀린 얘기가 아닙니다.

1967년, 우리나라에 등록된 자동차는 불과 6만 대.

전국의 도로 포장률은 8%에 그쳤고, 아스팔트를 밟아본 국민조차 드물던 시기였습니다.

▲1960년대 초중반, 서울 용산, 마포 등에서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도로 포장을 하는 장면 (서울역사아카이브)

고속도로라는 개념은 시민들에게 사치처럼 들릴 수밖에 없는 말이었죠.

일부 지식인들과 언론은 "차 한 대 제대로 못 만드는 나라에서 고속도로가 웬 말이냐"며

시기상조론을 폈습니다.

 

또 하나의 민감한 쟁점은 노선의 정치적 배분 문제였습니다.

초기 경부고속도로 노선은 대구에서 마산을 거쳐 직선으로 부산까지 내려가는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울산과 경주 지역의 강한 민원과 로비 끝에, 노선은 동쪽으로 우회하게 되었죠.

이 과정에서 호남과 강원은 철저히 소외됩니다.

야당 의원들은 이 점을 두고 "고속도로가 특정 지역만을 위한 길이 되었다"고 반발했고,

실제로 수도권–충청–영남권을 연결하면서도 호남권이 배제된 구조는 지역 갈등을 불러일으켰습니다.

▲ 1967년 6월, 대한뉴스 대국토계획현 중 경인/영동/경부/호남 고속도로와 관련된 설명 장면, 매일경제(23.09.13.)

이에 정부는 서둘러 균형을 맞추기 시작합니다.

충북 청주를 지나던 노선을 대전을 통과하도록 바꾸고,

여기서 갈라져 나가는 형태로 호남고속도로를 추가로 신설하겠다는 약속을 내놓습니다.

또한 영동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발표하며 강원 지역의 여론도 무마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호남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의 실제 완공은 훨씬 늦어졌습니다.

 

 

 

영끌 고속도로 건설의 시작

고속도로 건설을 진두지휘하는 최고사령탑은 청와대였습니다.

대통령의 집무실에는 항상 전국 지도가 펼쳐져 있었는데,

박 대통령은 시간이 날 때마다 지도 위에 선을 그리며 고속도로의 경로를 고민했다고 합니다.

또한 서울에서 부산까지 헬기를 타고 비행하며 지형을 확인했고,

수시로 현장 시찰을 나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예산’. 돈이 부족했던게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예산도 부족하고 외화도 모자라던 시기, 정부는 어떻게든 자금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말 그대로 영끌이 필요했던거죠.

가장 먼저 꺼낸 카드가 세금 인상이었습니다.

정부는 석유류세법을 개정해 휘발유세를 두 배 가까이 인상했습니다.

차를 몰고 다니는 것 자체가 고속도로 건설을 위한 세원이 된 셈이죠.

동시에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차량에게는 통행세를 신설해, 사용자가 비용을 분담하도록 했습니다.

 

민간의 부담도 강제로 끌어올렸습니다.

정부는 도로공채를 발행해 운수업체나 관련 기업들이 의무적으로 이를 인수하도록 했습니다.

도로교통에 간접적으로 이익을 보는 업계가 직접 재원을 부담하게 만든 구조였죠.

이렇게 모은 공채 자금은 약 50억 원에 달했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1965년 한일청구권 자금 가운데 27억 원을 고속도로 건설에 투입합니다.

식민지 배상금으로 받은 외화를 국가 인프라 구축에 재투입한 셈인데,

이 자금은 제철소·정유공장과 함께 경부고속도로의 뼈대를 세우는 데 사용됩니다.

 

 

 

공사현장에서 만난 정주영과 이명박

당시 대한민국의 인프라, 자본, 기술, 인력 어느 하나도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 난공사를 2년 5개월 만에 완공시킨 데에는

현대건설과 정주영 회장의 투혼이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 경부고속도로 현장을 시찰하는 정주영 회장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은 야전침대를 현장에 직접 가져다 놓고,

인부들과 함께 숙식하며 공사를 총지휘했습니다.

공사가 멈춘 곳이 있다면 그곳에 먼저 가 있었고, 문제가 생기면 직접 들어가 해결했죠.

 

대표적인 사례가 충북 옥천의 당재터널입니다.

이 구간은 수맥이 터지고 낙반 사고가 이어져 공포의 현장이었고,

실제로 이곳에서 3명이 순직했습니다.

근로자들이 도망치고, 작업 거부가 이어지던 상황에서

정 회장은 직접 착암기를 들고 터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너가 직접 목숨을 걸고 돌덩이를 깨부수는 모습을 본 근로자들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죠.

그렇게 똘똘 뭉친 결속력은 공사의 최대 난관을 돌파하게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정사장, 내가 미안하구먼”』미래한국(2016.04.12.)

공사 기간 동안 정주영 회장은 거의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로 불러 공사 진행 상황을 묻는 자리에서

그 앞에서 꾸벅 졸고 말았던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죠.

 

또 다른 비화도 있습니다.

당시 현대건설에 사원으로 입사해 뛰어난 두뇌와 근면함으로 눈에 띈 이명박 전 대통령

정 회장의 눈에 들게 됩니다.

중장비 정비과정을 맡고 있었는데

그는 고장 난 중장비를 밤새 분해하고 조립하는 방법으로 연구해 정비요령을 깨쳐갔고,

정사장보다 현장에 먼저 나와있는 유일한 직원이었습니다.

이때 별명으로 얻은 것이 ‘불도저’.

장비관리에 탁월한 역량을 보였고 정주영 사장으로부터 신임을 받게 됩니다.

그 이후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자재 총괄을 맡았고,

현대건설의 임원, 사장, 회장까지 초고속 승진하며 샐러리맨 신화를 쓰게 됩니다.

▲ [좌] 왼쪽부터 이명박 전 대통령, 고 정세영 명예회장(정주영 회장의 셋째 동생), 정주영 회장, [우] 현대그룹 사장단 사진

위의 좌측 사진을 보면 이명박 전 대통령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 당시 현대그룹 안에서 정주영 회장(왕회장이라 불렸음) 앞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둘 뿐이었다고 합니다.

 

 

 

희생으로 만들어진 눈물의 고속도로

전형적인 “돌관공사” 였습니다.

이는 군사용어에서 유래한 말로 ‘적을 향해 맹렬히 돌격하듯이’

공사기간을 최대한 단축해 빠르게 완공하는 것을 말합니다.

2년 5개월만에 완공하였으니 세계적으로도 매우 짧은 공기였습니다.

▲ 경부고속도로 기공식 현장(1968.02.01.)

박정희 대통령은 “일정은 절대 못 미룬다”고 못 박았고,

그 지시는 곧 현장 인부들의 ‘무조건 완공’이라는 압박으로 이어졌습니다.

위 기공식 현장에 써져 있는 “일 하며 싸우고 싸우면서 건설하자”라는 구호를 보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현장은 24시간 돌아갔습니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공사가 계속됐습니다.

군에서 차출된 공병장교들은 마치 작전 수행하듯 공정을 통제했고,

인부들은 쉴 틈도 없이 철야근무에 내몰렸습니다. 다들 힘들었지만 멈출 수 없었죠.

 

기술적인 한계도 컸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대형 고속도로를 지을 경험이 거의 없었습니다.

장비는 턱없이 부족했고, 인력도 대부분 비전문가였습니다.

그래서 별의별 방법이 다 동원됐습니다.

롤러를 분해해 여러 대로 나누어 쓰고, 심지어 소가 끄는 롤러도 등장했죠.

하천을 건너는 구간에서는 ‘우물통 기초’ 같은 생소한 방식이 도입됐고,

수중 발파 작업까지 벌어졌습니다. 지금 보면 마치 도깨비 공사 같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당재터널처럼 위험구간에선 낙반과 붕괴 사고가 잇따랐고, 총 77명의 인부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이름 없이 사라졌지만, 오늘의 도로 위에는 그들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서울 부산 간 고속도로 순직자 위령탑의 위치와 위령탑 전경

이들을 기리기 위한 위령비(위령탑)은 경부고속도로 하행선(부산 방향)

금강휴게소 부근에 위치해 있습니다.

금강휴게소(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조령리 소재)에서

휴게소 끝쪽의 샛길을 따라 조금 걸어 올라가면 찾을 수 있습니다.

이곳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과정에서 가장 난공사였던 당재터널(현 옥천터널)이

근처에 위치해 있어, 희생자 추모의 상징적 의미가 큽니다.

 

작업 환경도 열악했습니다.

무더운 여름에도, 혹한의 겨울에도 작업은 멈추지 않았고,

숙소는 비닐막이나 컨테이너 수준이었습니다.

식사도 부실했고, 사고 위험은 늘 곁에 있었죠.

인부들은 가족과 떨어져 정신적으로도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나라를 세운다”는 자부심 하나로 하루하루를 버텼죠.

 

 

 

한남대교와 경부고속도로가 강남 개발에 끼친 영향은?

일단 강남 토지 가치를 폭등시키게 됩니다.

제3한강교(한남대교)는 1969년 12월에 개통하여,

강북과 강남을 직접 연결하는 첫 번째 대형 교량이 되었습니다.

이전까지 강남은 논밭과 배밭이 대부분이었고,

강북에서 강남으로 넘어가는 길이 매우 불편했는데

한남대교 개통으로 강남의 교통 접근성이 극적으로 개선되면서,

강남은 개발 가능성이 높은 땅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죠.

▲ 강남지역의 지가상승 그래프(1963~1979), 강남구지(1993)

한 예로 1966년 한남대교 착공 당시 평당 200원 하던 잠원동과 신사동 일대 땅이

착공 1년만에 평당 3,000~4,000원이 되고

한남대교 개통되고 강남택지가 거의 마무리 된 1979년에는 40만원까지 치솟았습니다.

15년간 2000배가 된 거죠.

▲[좌] 영화 『강남1970』(2015), [우] 드라마 『자이언트』(2010)

그 당시의 시대상을 그린 영화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강남 1970』(2015)입니다.

제목이 왜 1970인지 저 위의 그래프 보면 아시겠죠?

1970년대의 강남지가가 엄청나게 폭등했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강남 개발과 부동산 투기, 권력·폭력의 공생을 사실적으로 그려냈죠.

저도 재밌게 봤습니다.

 

드라마로는 『자이언트』(2010)가 있습니다.

강남 개발의 역사와 그로 인한 사회 변화, 부동산 투기, 권력과 돈의 유착 등

현대사의 단면을 가족사와 결합해 극화했는데

당시 시청률이 40%를 기록하면서 대중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실제 인물과 사건을 모티브로 해서 무려 60부작으로 방영되었었는데…

기억하시려나 모르겠습니다. (제빵왕 김탁구와 함께 방영했었는데, 쌍벽을 이뤘던 드라마입니다…)

▲ [좌] 영화 『강남 1970』의 복부인 포스터, [우] 복부인 영화 포스터

그리고 이때 생겨난 말이 바로 ‘복부인’과 말죽거리 땅투기입니다.

역사적 배경이 있는 단어죠. 70년대 복부인들이 어떻게 강남을 휩쓸었는지

그 화려한 부동산 이야기는… 다음편에 써야 겠습니다.

(2부로 쓰려고 했는데 결국 4부작이 되었네요ㅠㅠ)

 

마지막 4부에서는 강남 개발의 전성기와 복부인,

그리고 말죽거리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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