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은 어떻게 한국 부동산의 심장이 되었나?

발행일 : 2025-06-02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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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래빗"이라는 닉네임으로, 부동산에 대해 궁금해할만한 주제로 글을 쓰는 현직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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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동산 시장을 보면, 강남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가격이 들썩이고 있습니다.

일부 지역은 거의 폭등 수준이죠.

마치 예전의 부동산 상승장을 다시 보는 것 같다는 말도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또 강남이냐”는 반응을 보이지만,

이 말 속엔 한 가지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담겨 있습니다.

 

강남은 예전에도 지금도 한국 부동산의 중심이라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왜 강남일까요?

왜 이 도시는 수십 년이 지나도 한국 부동산의 정점 자리를 내주지 않는 걸까요?

단순히 입지나 학군이 좋다는 말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강남은 단지 좋은 지역이 아니라, ‘상징’이 되었기 때문이죠.

 

이번 칼럼에서는 그 상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되짚어보려고 합니다.

부동산이 아니라 도시 개발의 역사로부터 그 실마리를 찾아보려는 것이죠.

(제가 또 도시개발사, 한국경제사에 관심이 많거든요…)

사실, 강남은 자연스럽게 생겨난 도시가 아닙니다.

치밀하게 계획되고, 정책적으로 집중된 결과물입니다.

그 탄생의 출발점부터 따라가 보겠습니다.

 

칼럼은 2부로 나누어 연재하고자 합니다.

1부에서는 여러분들이 익히 알고 계신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강남 개발의 시작과, 강남을 교육의 중심지로 만든 학군 이동의 역사입니다.

2부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공공기관의 강제 이전, 강북에 내려졌던 규제, 그리고 경부고속도로라는 숨은 설계 요소들...

오늘은 그 1부 입니다.

 

 

 

강남개발의 출발 : 영동신시가지 개발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시점은 1960년대 후반부터입니다.

당시 서울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죠.

도시의 중심이었던 강북은 이미 포화 상태였습니다.

주택은 부족했고, 도로와 기반시설도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서울은 더 이상 안에서만 해결할 수 없는 도시가 되어가고 있었던 셈입니다.

▲ 1950년대 무허가 건물들의 전경, 『서울사진아카이브』

도심에 살 집이 부족하게 되니 사람들은 몰려와 판자집을 짓고 살게되고

이게 사회적 문제로 이어졌습니다.

서울 곳곳에 판자집과 달동네가 형성되었고 빈민들이 모여살면서

위생과 안전문제, 화재나 수해와 같은 재난에 취약한 주거 환경이 만들어졌죠.

그리고 서울시에서는 이를 도시미관과 환경을 저해하는 요소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1969년 금화시민아파트, 『서울역사아카이브』

위 사진은 1969년 서대문구의 금화시민아파트의 전경입니다.

서울의 주택난과 대규모 주택건설 정책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당시는 금화산 판자촌을 밀어내고 서민들을 수용하고자 지은 것입니다.

그 뒤에 달동네 보이시나요??

저런식으로 사람들이 공간만 있으면 판자집을 만들어 살았던 것이

전후 이후의 서울 모습이었습니다. 정확히는 서울 강북의 모습이었죠.

 

참고로 저 금화아파트를 지을 때에도 공사때부터 토반이 무너져내려 아래쪽에 있던

판자집 주민들이 깔려서 사망하는 일도 발생했습니다ㅠㅠ 현재는 철거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한강 이남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그 당시에는 풀숲이 무성한 미개발지였죠.

▲1970년 2월, 논현동 일대의 모습 (논??)

1971년 1월(왼쪽), 1970년 4월(오른쪽) 촬영된 압구정동 일대 배밭과 민가의 모습. 오른쪽 사진 부지에는 지금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이 들어서 있다. [압구정향우회·강남구청]

▲ 압구정동 일대 배밭과 민가의 모습, 우측 사진은 지금의 "현대백화점 본점" 부지 (1971, 1970년)

당시에는 이런 모습이었죠.

 

위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강남 지역은 본래 서울이 아닌 곳이었습니다.

1963년에 서울시로 편입되면서부터 행정적으로 ‘서울 강남’이 된 것이죠.

그전까지만 해도 이 지역은 논밭과 구릉지대가 섞인 한적한 외곽이었습니다.

▲김현옥 시정의 『새서울'구상과 한강 및 여의도 개발』 (2023)

위 사진을 보시면 시대가 지날수록 점점 서울이 확장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강 이남의 관악산 위의 점선 표시 구역이 사실강 한강이남인 ‘강남’인데

1963년에 서울로 편입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정부는 이 지역에 새로운 서울의 미래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박정희 정부는 강북의 투기를 억제하고, 인구를 분산하며,

도시의 균형 있는 성장을 유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강남 개발을 추진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70년에 발표된 영동지구 개발계획입니다.

이 계획은 강남을 단순한 주거지로 만들겠다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행정, 상업, 주거 기능이 결합된 제2의 서울을 만들겠다는 야심이 담겨 있었죠.

 

 

 

여기서 말하는 영동은 어디??

여기서 ‘영(永)’은 영등포(永登浦)의 앞 글자에서 따온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서울의 주요 지역 중 하나였던 영등포를 기준으로,

그 동쪽, 즉 ‘영등포 동쪽에 위치한 지역’이라는 뜻이죠.

 

한강을 기준으로 보면 ‘영동’은 한강의 남동부를 의미합니다.

지금의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일대가 이 범주에 들어갑니다.

당시에는 ‘강남’이라는 지명이 일반화되기 전이라, 행정계획 문서나 정책에서는

‘영동지구’라는 표현이 더 널리 쓰였던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1975년 강남구가 정식 분구되고,

1980년대에 들어서 ‘강남’이라는 이름이 점차 보편화되면서

‘영동’이라는 이름은 점점 쓰이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강남’의 도시계획은,

사실상 ‘영동지구 개발계획’이라는 이름 아래 시작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영동신시가지 건설공사 현장모습(강남구청, 강남소식)

영동지구개발계획은 단호하고 속도감 있게 진행됩니다.

대규모 택지 조성, 도로 확충, 다리 건설이 동시에 이루어졌습니다.

한남대교(1969년), 동호대교(1970년), 영동대교(1973년) 같은 인프라가 이 시기 집중적으로 건설되죠.

이는 단순한 교통 편의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강남을 서울과, 나아가 전국과 연결하는 도시의 축으로 만들겠다는 전략이었습니다.

▲ 논현동에 가장 먼저 들어온 ‘공무원아파트’(1971)

위 사진은 논현동에 가장 먼저 들어온 ‘공무원아파트’입니다.

1971년 12월에 준공된 강남 최초의 아파트단지죠.

1970년대 초 강남(영동지구)은 허허벌판에 가까웠고,

민간이 먼저 들어와 집을 짓거나 투자할 이유가 부족했습니다.

이에 서울시는 강남 개발을 본격화하기 위해 가장 먼저

논현동에 공무원아파트(영동공무원아파트)를 건설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시는 공무원들을 거의 강제로 이주시켜, 인적·주거 기반을 먼저 마련했죠.

 

당시 일부 공무원들은 불편함을 못 견뎌 다시 강북으로 돌아가기도 했으나,

이 아파트가 들어서자 주변에 주택과 상가가 점차 들어서며 강남의 시가지화가 시작합니다.

지금의 “선도지구” 같은거라고 보시면 되겠네요.

 

 

 

강남 성공의 1등 공신 : 학군의 이동

강남이 부동산의 중심이 되는 데 있어 결정적인 기여를 한 요소는 단연 ‘교육’입니다.

특히 197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학군의 이동은

강남의 위상을 단순한 신도시에서 교육 중심지로 끌어올린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강남은 막 개발을 시작한 지역이었지만,

놀랍게도 전통 명문고들이 하나둘씩 이 지역으로 이전하기 시작합니다.

경기고, 휘문고, 중동고 같은 대표적인 명문 학교들이 강남으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죠.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도심인 강북은 이미 과밀했고, 학교를 확장하거나 현대식 건물을 짓는 데

물리적인 제약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신도시였던 강남은 땅도 넓고 계획도 여유 있었죠.

고교평균화 정책이 시행되기 전까지 서울에는 5대 공립(경기, 서울, 경복, 용산, 경동고)과

5대 사립(중앙, 양정, 배재, 휘문, 보성고)이라 불리는 명문 고등학교가 있었습니다.

이 중 최고 명문고는 경기고였죠.

그래서 경기고부터 이전명령을 받게 됩니다.

 

그 이후 휘문고, 서울고 등… 각각의 학교들이 “지목”되었고

처음에는 반발이 거셌지만, 유신체제하에서 철회는 있을 수 없죠…

그래서 이렇게 다 날라갑니다. 강남으로…

사실 학교를 이전한 초반에는 상황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영동지구의 고등학생 입학생이 부족해 인접지역 학생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었죠.

이에 반해 영등포구와 관악구, 강서구는 학교가 부족하여

이곳 학생들은 인근 지역 학교를 다녀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이 같은 사례를 보더라도 강북 고등학교의 강남 이전은

교육 목적이 아닌 강남 개발의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학교들은 정부의 압박이나 행정 계획에 따라 사실상 반강제적으로 이전을 결정해야 했습니다.

"좋아서 간 것"이 아니라, 떠밀리듯 간 경우도 있었던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입장에서는 무조건 나쁜 선택만은 아니었습니다.

넓은 부지와 신축 캠퍼스 건설 지원,

그리고 당시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은 강남이라는 신도시에 대한 선점 기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경기고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실 ​1972년 10월 28일 강남 이전 계획이 발표되자 경기고는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그래서 서울시는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종로구 화동에 위치한 경기고 교사를 리모델링하여

도서관(정독도서관)으로 사용한다는 타협안을 제시하였습니다.

또한 고교평준화가 시행되기 전인 1973학년도에 입학한 학생들이

종로구 화동에서 졸업할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죠.

경기고는 신축 교사는 기본이고, 기존 학교터보다 넓은 부지의 확보와 유망한 지역으로

이전을 희망했습니다.

 

그 결과 경기고는 강남구 삼성동 수도산 기슭에

3만2천평의 부지(애초 예정 부지 2만3천평)를 제공받게 됩니다.

경기고의 이전 비용은 10억 원으로,

당시 고등학교를 새로 짓는 비용보다 2배 많은 금액이었는데 상당한 금액이죠.

오른쪽 언덕 위의 건물이 강남구 삼성동에 지어진 경기고 모습입니다.

(참고로 서울에 있는데 경기고인 이유는 설립당시 서울이 경기도 광주군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명문고 이전 이후, 학원까지 옮기다.

이렇게 명문고들은 강남으로 옮겨졌지만,

실제로 많은 학생과 학부모들이 곧장 강남으로 이주하지는 않았습니다.

강남의 생활 인프라가 부족했고, 대중교통 등 접근성도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강남 학교들은 신입생 정원을 채우는 데도 애를 먹었고,

오히려 강북에 남아있는 전통 명문고(경복고, 중앙고 등)로 지원이 몰리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죠.

강남에 학교가 옮겨졌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여전히 강북에서 강남 학교로 통학하거나,

강남에서 학교를 다니면서도 과외나 학원 등은 강북

특히 종로 등 기존 교육 중심지에서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학원까지 강남으로 이전시키게 됩니다.

인문계 사설학원 36개를 강남, 잠실, 영등포로 이전시키고

따르지 않으면 행정조취를 취하는 등 강경한 입장을 보였죠.

반대로 강남으로 이전을 하면??

경제적, 행정적 특혜를 약속하면서 강력한 이전정책을 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와 학원, 교통 등 인프라가 갖춰지고,

명문고의 강남 이전이 ‘교육 특구’로서의 강남 이미지를 강화하면서

점차 사람들이 강남에 정착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육열이 높은 학부모들이 자녀의 명문고 진학을 위해 강남으로 이주했고,

이 과정에서 ‘8학군’ 신드롬이 본격화됐습니다.

하지만 이 현상은 1980년대 중반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강남8학군이 뭐길래…

일단, 학군이란 개념은 고교평준화가 시행된 1974년에 서울을 6개 학군으로 편성함으로서

생겨난 용어입니다.

당시 학군은 학생들의 고등학교 배정을 위해 행정구역을 나눈 단위로,

특정 학군 내 거주 학생이 해당 학군의 학교에 진학하도록 한 제도적 장치였을 뿐입니다.

 

8학군이라는 명칭은 1980년대 도심 공동학군이 폐지되고,

고등학교 배정이 거주지 중심으로 바뀌면서,

서울 시내 고교가 11개 학군 체제로 조정될 때 생겼습니다.

이때 강남구와 서초구를 묶은 학군이 8번을 부여받으면서 "8학군"이라는 이름이 붙었죠.

그래서 8학군은 그냥 순서에 따른 번호일 뿐입니다.

 

 

 

교육특구 8학군의 화려한 데뷔

학군제 도입이후 고교 입학생들이 처음으로 대학에 진학한 1984년,

서울대는 8학군의 독무대가 됩니다.

▲ 서울대 국토문제 연구소 논문집『강남8학군 지역의 형성』(2004.8.)

보시면 영동, 위문, 경기, 상문, 서울이 상위 점수를 휩쓸고

상위합격자수도 역시나 8학군의 초강세를 보입니다.

(당시 서라벌고도 잘나갔죠.)

 

리스트에 올라오지 않은 학교들도 입결이 좋았고 모두 전국 100위권 안에 들었습니다.

예상된 결과였죠.

 

 

 

교육특구 형성의 생각치 못한 결과

이런 명문고 이전은 인구분산의 목적이었으나,

학군제 개편으로 인해 강남 거주자만 명문고 진학이 가능해지면서

강남서초가 교육특구화의 시발점이 됩니다.

 

이전까지는 출신 중학교별 배정이었으나, 거주지 기준으로 바뀌면서

명문고를 진학하기 위해서는 "강남 거주"가 필수 조건이 되버린거죠.

왼쪽의 사진은 1989년 2월, 서울시 교육위에서 학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들이 강남 8학군에 배정받지 못한 것에 항의하며

교육위 직원의 멱살을 잡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기사는

『명문고 주변 주민위장전입 늘어(중앙일보)』(1981.10.30.)

 

그래서 이 위장전입 잡겠다고 경찰 등 관계기관이 합동으로 단속을 하기도 했는데

1983년에는 경기고, 서울고 등 10개교 주변의 47동을 단속, 3212명의 조사 대상자 중

238명을 적발하기도 했습니다.

 

 

 

교육으로 인해 계층이동이 발생

명문고와 학원가가 집중된 8학군에 교육열 높은 중산층 이상 가구가 대거 유입되며,

"좋은 대학 = 8학군 거주"라는 공식이 확산되었고

1987년 강남 아파트 가격이 1980년 대비 300% 이상 상승하는 등 부동산 신화와 결합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과를 보자면

1) 명문고 유치

2) 학원가 형성

3) 중산층 유입

4) 부동산 가격 상승

5) 교육인프라 투자

6) 더 많은 유입

이러한 순환구조로 인해 강남은 교육, 경제적 특권의 상징으로 착화 되었고

1980년대 말, “8학군병”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며

교육 불평등과 계층격차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됩니다.

그 이후, 이러한 학군조정에 대한 요구가 많았으나

통학거리와 배정불만, 학부모와 학생들의 반발 그리고

정치적 부담과 사회적 논란 등 다양한 문제로 인해 실질적으로 추친되지 못하고

뜨거운 감자로 남게 됩니다.

 

그리고 90년대, 외고와 과고가 생기면서 명문고 중심 체계가 흔들렸으나

강남은 새 교육 트렌드에 맞춰 대치동 등 초대형 학원가를 육성하게 되고

2020년대인 현재까지 서울대 합격생 25% 이상을 배출하며

사교육 시장에서도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계산된 개발

지금까지 강남이 어떻게 개발되었고, 왜 교육 중심지가 되었는지를 살펴봤습니다.

한강 남쪽의 허허벌판이 국가 주도의 도시개발을 통해 새로운 서울로 재편된 것이죠.

그리고 그 중심에 학군이 있었습니다.

 

교육이라는 강력한 자산이 더해지면서,

강남은 단순한 주거지를 넘어 미래를 담보하는 투자처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 과정을 보면 강남의 현재는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국가와 시장, 정책과 사교육, 학교와 학부모가 얽힌 복합적인 결과물입니다.

그리고 이 복합성은 지금도 계속 작동 중이죠.

 

다음 칼럼에서는 덜 알려진 이야기들,

즉 공공기관의 강제 이전, 강북에만 내려졌던 규제,

그리고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이 강남 개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2편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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