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행동 연구가가 된 사연”

발행일 : 2021-09-16 09:56 조회수 381회 좋아요 1 댓글 0



“낯선 행동 연구가가 된 사연”

 

송형호

 

1984년 실업계 사립고등학교인 인덕공고에서 영어교사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영어 학력이 낮은 편에 속하는 학교인지라 당시 저는 영어에 흥미를 잃은 아이들과 재미있게 가르칠 수 있을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88년 사립 인문고로 옮겼다가 89년 여름 전교조 가입으로 해직되었습니다. 해직 이전에 학생들에게 체벌했습니다. 숙제 안 해 오거나 질문에 대답을 못 하면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세 대씩 때렸지요. 제가 중학교 다닐 때 선생님께서 쓰시던 방법인데 별생각 없이 따라서 한 것이지요. 제가 해직될 때 저희 반 애들이 제게 엽서를 한 장씩 써 주었는데 격려의 글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그중 한 장에 "선생님, 복직하시면 때리지 마세요, "라는 글이 있어 충격을 받았어요. 4년 반의 해직 생활을 접고 복직하면서 의미 있는 결심을 하고 싶었어요. 매를 포기하자는 약속을 저 자신과 했어요. 그런데 여중으로 복직이 되었습니다. 남자 고등학생을 가르치다가 중학생을 가르치려니 여간 힘겨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중1의 경우 알파벳부터 가르쳐야 한다니 어떻게 이를 가르쳐야 하는지 노하우가 없었습니다. 체벌을 포기하고 보니 수업과 학급운영에 엄청난 애로를 겪었습니다. 이즈음이 이른바 공교육 붕괴가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해서 위안을 삼기도 했지만, 교실에서 불과 두세 명 학생만이 수업에 참여하는 충격적인 경우도 보면서 수업 준비로 밤 열 시까지 학교에 남아있던 일이 허다했습니다. 복직하던 해에 “처음처럼”이라는 신영복 선생의 글씨가 담긴 액자가 유행했습니다. 복직하고 얼마나 힘이 들던지 아내에게 “도대체 누가 ‘처음처럼’ 하자고 한 거야? 애들이 옛날 애들이 아닌데,”라고 볼멘소리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에 전혀 참여하지 않던 한 학생의 연습장을 넘겨보다가 그 학생이 만화 그리기에 탁월한 소질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공부하지 않을 거면 교과서의 단어를 소재 삼아 만화로 그려보라고 인심 쓰듯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습니다.

다음 날 아이는 15컷의 만화를 그려서 왔습니다. 저는 아이의 솜씨가 만만치 않아 보여 격려를 해주려는 의미로 단어의 중간 철자 일부를 화이트로 지우고 밑줄을 그은 다음, 반 학생 수만큼 복사해 수업 시간에 나누어 풀어보라고 주었습니다.

복사물을 나누어주기가 무섭게 아이들이 그 만화 퀴즈를 푸느라 머리를 숙여 빈칸을 채워나갔습니다. 어디선가 째깍째깍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벽시계의 초침 소리였습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몰입했던지 시험 때보다 조용해서 시계 소리가 들렸던 것입니다. 그토록 산만하던 수업 분위기가 차분해지고 대단히 집중하여 단어학습을 하는 모습을 보게 외었습니다. 이에 희망을 보고 이제부터 단어 외라거나 몇 번씩 써오라는 과제 대신 양식을 인쇄해 나누어주고 만화를 그려오라는 숙제를 내니 그야말로 대박이었습니다. 반마다 열 장 이상의 이미지 단어 학습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만화를 보고 단어를 맞추는 것은 학습이 아니라 “놀이(play)”였습니다. 학습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은 놀이에 참여하면서 스스로 학습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이가 무기력했던 것이 아니라 제 수업이 무기력했던 것입니다. 이후에는 빽빽이, 깜지라는 반복해서 쓰기 숙제에서 벗어나 만화를 그리도록 해서 그림사전(Pictionary)이 탄생하게 됩니다. 만화를 그리기 어려워하는 아이들에게는 낱말 퍼즐을 만들어 보게도 하고 휴대폰에 사진 기능이 탑재되면서 사진으로 찍어보게도 하고 이를 홈페이지 등에 탑재하게 되면서 수업에 활력이 생겨났습니다. 아이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교과서를 체험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체험 결과를 동료들과 공유하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학급운영은 수업 운영보다도 더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교직 경력이 쌓여갈수록 베테랑이 된다는 느낌은커녕 생활기록부 수기 시절에는 출결 통계가 안 될 만큼 지각, 결석이 많아지기도 했습니다. 체벌 부활의 유혹이 엄청났습니다. 하지만 저와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어서 도대체 아이의 문제 행동의 원인을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과목이 영어인지라 misbehavior(문제 행동)나 discipline(훈육)으로 검색해서 책을 수입해 탐독하기 시작했고 아이들의 행동에 담긴 목적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 행동의 원인을 알기 전에는 나무라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니 가장 큰 딜레마가 정작 그 원인을 알고 나면 나무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애들은 애들 대로 다 그만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의 행동을 “문제”라고 이름 붙이는 것은 매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문제 행동이라는 말 대신 가치중립적인 표현을 찾다가 “낯선 행동”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 아픔을 모은 책이 퇴임하면서 낸 “송샘의 아름다운 수업”입니다.

궁리 끝에 1인 1역을 중심으로 해서 각자 자기 역할을 하도록 하고 2명씩 하는 주번 활동도 시기와 파트너를 자율로 결정하게 하면서 1인 1역과 주번 활동에 대해 5단계 동료평가를 하여 상위 득점자를 학교장상 모범상과 장학금 대상자로 추천하고, 각각 3.5점 이상이 되는 학생은 생활기록부에 그때그때 우수하다고 기재하고 정기고사 후 성적표와 함께 생활기록부 사본을 가정에 보내드리면서 아이들이 “우리 담임은 공평하고 철저하다,”고 인정해주면서 학급 운영에 평화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명퇴를 결심하게 된 것은 우리 학교가 아이들의 낯선 행동 때문에 홍역을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학생만 그런 게 아니고 초등, 고등학생 마찬가지이고 도시와 시골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체벌 금지라는 매를 일찍 맞으면서 새로운 훈육의 키워드는 참여와 소통, 돌봄과 치유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런 체험을 돌봄치유교실 카페( https://cafe.naver.com/ket21 )에 탑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교사 연수 전에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그 학교 학생들의 낯선 행동 목록을 받아 이를 기반으로 강의를 준비합니다. 날이 갈수록 낯선 행동의 종류와 정도가 많아져서 한편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한편 기쁩니다. 선생님들이 커밍아웃하기 시작하신 것이지요. 문제를 드러내야만 해결책도 찾아지는 법.

이집트 로제타석에 반복되는 말이 “요즘 젊은 애들은 버릇이 없다,”라지요. 낯설지 않으면 젊은이가 아니겠죠?

 

천호중 2학년 학생들이  2014년 미술시간에 일인당 5개씩 만든 총 994개의 그림사전(pictionary) 파일을 올립니다.
(김정아, 이미라 선생님 지도)
원본 파일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비상업적 목적 사용에는 저작권 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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